[ 생각 던지기 ] 갈래에 속한 글

내가 보수주의자가 된 까닭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칭하는 수구주의자나 기득권자들이 온갖 허튼짓을 하는 탓에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혹은 깐깐한 어른들 사이에서 젊은 내가 보수주의자라고 말을 하면 다소 구박을 받곤 한다. 게다가 실용주의자라는 말까지 하면 이명박 대통령 지지자로 오인을 받을 수도 있다. 더구나 일부 사람들이 “한나라당”을 “한날당”이라고 부르는 탓에 내 필명인 “한날”로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실은 꽤 오래도록 진보주의자였고, 지금도 그런 성향을 꽤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갈수록 진보성보다는 보수성이 강해지고 있으며, 심지어 진보에 의문을 품고 있다. 진보에 의문을 품으며 서서히 보수 쪽으로 머리가 향하는 이유는 이러 저러한 것들을 보고 겪으며 머리를 채우고 이들이 어우러져 개똥철학이나마 갖춰진 데 있다.

모순되지 않은가? 앎을 추구하기보다는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현 체제를 유지하려 애쓰는, 머리에 똥만 가득 찬 이들이 보수주의자들인데, 소신이나 철학이 생길수록 보수성이 짙어지니 말이다. 이는 기득권자나 자본가, 권력자들이 사회에 두루 뿌려 놓은 거짓말에 기만 당하고 사기를 당하기 때문에 모순되어 보이는 것뿐이다. 저들은 변화 빠르기나 폭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익일 뿐이다. 반면, 보수주의자는 느릴 뿐, 기득권 주장과는 별 관계없다.

물음 하나를 머리 속에 크게 써보자.

진보가 정말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

정치 영역에서 뜻하는 진보와 구분을 해야 한다. 여기서 진보란 사전에 나오는 뜻, 그러니까

정도나 수준이 나아지거나 높아짐.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함.

이런 뜻이 있는 낱말을 뜻하며 정치 쪽에서 뜻하는 진보는 뒤에 차츰 나온다. 어쨌든 나는 사회 변화와 발전이 부담스러워서 도무지 정이 가질 않는다. 저 진보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확신도 들지 않는다.

이익 극대화를 위해 효율을 높이려는 혁신은 해당 분야나 사회 측면에서 진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는 대다수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장담할 순 없다. 기계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점차 일자리를 잃고 있다. 즉, 효율을 높이려고 대체로 느리고 불확실성을 가진 개체인 사람을 몰아내는 것이다. 발전이 불러온 효율이란 그런 것이다. 이러한 진보는 정치/사회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기술 진보주의자나 혁신자가 이끌어 내며, 이는 진보주의를 거부하는 자본가에 의해 경제계에 도입되고 극대화된다.

이 역시 사기극이며 말장난이다. 진보주의자들이 좇는 진보란 단순히 기술 진보만을 뜻하지 않는다. 다양한 발전과 변화를 통해 우리의 삶 자체가 진보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보존하거나 늘려줄 경제 체계에 효율을 극대화하여 기술이나 사회 진보를 도구로 이용한다. 즉, 이러한 진보는 시작이나 의도와는 달리 그 운용이나 결과는 기득권 발전 장치로 쓰여 넝마가 되고 만다.

진보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면 삶의 진보로써 작동될 수 있는 사회 환경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 사회는 경제 활동을 우선시하고 있다. 단도직입 하자면 경제에 개개인의 삶, 그리고 그 삶이 모인 사회가 지배받고 있으며, 이렇게 편향된 사회 환경에서 진보 역시 삐뚤어지거나 특정 진보만이 가치를 인정받는다. 진보가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모순된 말이 허용되는 것이 현 사회이다.

돈이라는 경제 수단이 생긴 이래 경제 체계에서 통용되는 모든 가치는 돈이라는 매개체로 대표되고 있다. 뜻을 가리키지만, 실제 그 뜻 자체를 품지 못하는 기호처럼, 실제 가치를 가지지 못하지만 그 실제 가치를 대표해서 현 경제 체계에서 거래되는 것은 돈이다. 대다수 사람이 누리는 삶의 가치는 경제 활동 개체(상품, 서비스 등)를 통해 얻는 2차 만족감에서 이뤄지며, 이러한 개체는 돈으로 대표된다. 아니, 대표성을 넘어서 돈으로 결정 지어진다.

결국, 진보도 경제에 통제되어 진보에 따른 참된 결과마저도 경제 수단으로 발이 묶이고 만다. 그 대가는 경제 효율 극대화라는 찬사와 함께 체제(system)는 진보하고, 그 체제를 이루는 부품들인 사람들은 더 나은 부품, 즉 진보의 결과물에 대체되어 결국 불행해지고 만다.

대체로 IT 얘기를 많이 한 블로그이니 Open API를 예로 들어보자. Open API는 대단히 진보된 애플리케이션 통신 규약이다. 폐쇄에서 개방으로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힘이 약한 자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렸으며, 이용자들 역시 진보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API는 플랫폼에 종속되어 있어 플랫폼 소유자가 곧 API 역시 소유하는데, 이를 개방하여 누구나(?) 그 플랫폼에 접근할 수 있게 했으니 얼마나 큰 변화인가.

힘이 센 이들, 즉 기득권자나 독점자 관점에서 보면 느낌은 사뭇 다르다. 얼핏 보면 플랫폼 소유자가 많은 부분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손해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더 큰 이득을 보는 것이다. 양에서 질로, 이제는 질을 넘어서 선점이 중요한 요즘 세상에 혼자서 그 무거운 플랫폼을 등에 업고 다양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모하다. 질은 몰라도 양이나 속도에서는 폐쇄 플랫폼이 개방 플랫폼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플랫폼 소유자로서는 플랫폼을 Open API로 개방하는 것은 폐쇄형 플랫폼에서 낼 수 없는 효율을 내기 위한 진보이다.

해당 플랫폼을 소유한 기업이나 단체에서 API 개발자로 일하던 이에겐 이런 변화가 재앙이 될 수 있다. 해당 분야나 산업군에선 분명히 높은 효율을 보장하는 진보이겠지만, 그러한 기술과 철학 진보가 그 일을 하던 개인에겐 불행이 될 수 있다. 이들은 여가를 쪼개어 자신을 계발하여 변화라는 괴물을 피하여 살아남거나, 혹은 조직에서 나와 바깥에서 Open API를 활용한 자영업자가 되어야 한다. 물론 같은 직무로 다른 기업이나 조직에 갈 수 있지만, 산업군에 휘몰아치는 변화라는 파도를 완전히 피하기란 쉽지 않다.

굉장히 모순된 상황이다. 조직체는 그 성향상 보수성이 강한데, 진보 때문에 보수성이 어느 정도 보장하던 안정감은 흔들리고, 그 흔들림에 털리듯 튕겨 나온 이들 중 상당수는 불안정 속에서 플랫폼 소유자와 경쟁한다.

물론, Open API가 단순히 효율을 높인 것은 아니며, 이전에 없던 기회와 가치를 개방하여 넓혔다는 점 역시 인정한다. 위 예는 진보가 기득권자나 자본가들에게 어떻게 무기화 되는지를 다소 편향된 관점에서 든 것일 뿐이다. 굉장히 진보성이 강한 오픈 소스 프로젝트(Open Source Project)들이 사람과 사회에 미친 좋은 진보를 인정하고 사랑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능력이 낼 수 있는 가치가 평가절하되거나 심지어 일자리를 잃는 힘 약한 다수를 외면하긴 어렵다.

이렇게 볼 때, 진보는 진보로써 사람과 삶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힘센 권력자에게 무기가 되는 흐름과 모습을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진보주의에 담긴 철학이 경제 가치를 늘리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삶을 더 따뜻하고 뜻깊게 할 방향을 가리킬 수 있는데, 정작 현실에선 나를 현혹하고 기만하며 심지어 내 목까지 겨누는 도구나 수단이 되고 있다. 마치 TV나 언론 매체들이 내게 그러하듯 진보 역시 그렇게 악용되는 것이다.

처음 진보주의를 접하고 그 매력에 빠졌다가 골수와 심장까지 얼려버리는 현실이라는 냉수 한 잔에 정신을 차렸다. 진보주의자는 진보를 철학과 행동, 실천으로 바라본다면, 기득권자나 자본가들은 진보를 무기로 쥐어 휘두르며 진보주의자 역시 그 무기에 위협을 받는다. 심지어 진보주의자마저 무기처럼 대하여 진보는 더욱더 왜곡되어 사생아가 되거나 괴물이 되어 태어나 많은 사람을 괴롭힌다.

결국,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불편함은 기꺼이 감당하며, 만족을 한다면 굳이 지금보다 더 진보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즉 세상 흐름을 부담스러워 하는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혹자는 패배주의자, 혹은 도망자라고 비난을 할지 모르지만, 난 아직 졌거나 도망친 적이 없다. 또한, 큰 변화나 빠른 변화를 부담스러워 할 뿐, 틀을 유지하며 더 나은 가치를 좇는 혁신을 모색하고 있다. 가짜가 아닌 진짜를 찾아 끊임없이 공부하고 궁리하여 나 자신을 무기가 된 진보로부터 지켜내려 한다. 이러한 사회와 이러한 결심으로 나 자신을 보수주의자라 부르게 되었고, 당분간은 계속 그렇게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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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프로그래밍을 계속 하는 이유

난 기획자이다. 무슨 기획자인지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1999년부터 2007년 상반기까지는 게임 기획자였고 2007년 하반기부터는 웹 기획자인데, 지금 내 주 영역은 웹 기획이지만 아직까지는 나를 드러내는 정체성이나 차별성은 게임 기획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업계에 본격 나온 때인 1999년부터 실무 직무도 애초 기획이었고, 아마추어 때에도 기획이 멋져보여서 기획으로 일을 시작했다.

내 블로그들에서 드러나는 내 직무는 프로그래밍에 가깝다. 기획 얘기 보다는 개발 얘기를 더 많이 한다. 기획자 치고는 개발 관심도 많은 편이다. 다룰 줄 아는 프로그래밍 언어는 c, c++, php, asp, perl, python, javascript, html, xml, sql 을 들 수 있고 며칠 전부터 ruby 를 익히고(2년 전부터 애써 외면해오다 드디어 손을 대고) 있다. 기술로는 ajax, win32api/mfc, css 를 다룰 줄 안다. 어플리케이션 만들기라면 일기장, 웹 개발이라면 게시판 정도 만드는 걸로 만족하고 있고, 그것 마저도 높은 성능이나 협업을 위한 코딩을 담지 못하고 있긴 하다. 운영체제는 Linux 계열(시작은 Redhat Linux), FreeBSD, Mac OS X, Windows 계열을 다루며, DBMS는 mysql 과 sqlite 정도만 다룬다. 물론, 다룰 줄 알 뿐, 깊은 이해나 활용을 하는 건 아니다. 이쯤 얘기를 하면 나를 개발자라 생각하는 상황이 보통이다.

사실 프로그래밍을 좋아하진 않는다. 아니, 프로그래밍으로 돈을 버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프로그래밍은 어디까지나 취미일 뿐이며, 머리 속에 있는 발상을 가볍게 구현해서 손맛을 알아보거나 장난감을 만드는 쓰임새로 다룬다. c를 공부했던 1997년부터 그랬다. linked list 를 포인터로 구현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신기하고 재밌긴 했지만, 이런 암호문으로 밥벌이를 하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치도 들지 않았다. 비록 내 가까운 사람 몇 명을 개발자로 꼬득여 만들긴 했지만 난 개발자가 되고 싶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프로그래밍을 여전히 공부하는 것이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일까. 표현과 소통, 균형있는 관점, 그리고 자기 이해 과정 때문이다.

자기 이해 과정을 위한 프로그래밍

기획 일을 10년 가까이 해왔지만 머리가 나쁜 탓인지 머리 속에 있는 생각만으로는 도무지 실체가 잡히지 않을 때가 많다. 추상화한 머리 속 기획은 추상화된 말장난과 어울릴 뿐, 실체화된 결과물과 맞아 떨어지지 않을 때가 흔하다. 이를테면, 상상 속에서 나는 apm(Action per Minute) 1,000으로 자판과 마우스를 조작하며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인 이영호나 송병구, 이제동 같은 고수들을 가뿐하게 누르는 기계 같은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나보다 손과 눈이 빠른 상대방이 내 본진에 있는 일꾼들을 학살하고 있어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상황과 같다. 아무리 내 머리 속에서 손맛이 끝내주는 게임을 그렸어도 그 손맛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설명을 하려면 막연한 표현들을 사기꾼처럼 떠벌이다 스스로 제 논리 발에 걸려 자빠진다.

벤 커즌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용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은 게임 중 게임 속 인물이 뛰어오를 때 공중에 떠있는 시간이 0.7초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0.7초이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에 나오는 마리오가 땅에서 폴짝 뛰었다가 땅에 닿는 시간이 0.7초이다.
(디벨로퍼 매거진 2002년 8월호 – 라프 코스터의 재미이론 참조)

그 뛰어오르는 시간이 머리 속에 제대로 그려지는가? 그려졌다고 해서 그 느낌이 실제로 개체 하나가 어느 한 지점에서 떨어져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시간이 0.7초인 실제 화면 속 느낌과 과연 같을까? 설령 뛰어올랐다 땅에 닿는 체공 시간이 0.7초로 구현했다손 치더라도, 뛰어오르는 순간부터 가속을 받았다가 정점에 가까워질수록 감속을 하고 다시 땅으로 내려올 때 가속을 받게 해서 0.7초인지, 아니면 뛰는 순간부터 땅에 닿는 순간까지 동일한 빠르기로 움직인 것인지에 따라 머리 속에 막연하게 그려져있던 “예쁘고 시원스럽게 뛰는 느낌”과 다를 수 있다.

즉, 어지간히 감이 예민하고 학습/훈련된 이가 아니면 대부분은 0.7초라는 객관화 된 느낌을 그리기 보다는 자신의 취향이 반영된 느낌을 그린다. 하물며 자기 자신 조차도 머리 속 생각과 실재를 일치시키기 어려운데, 그 생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해서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은 얼마나 어려울까? 그래서 기획자 스스로 머리 속에 있는 “그 느낌”에 확신과 개념 정립이 안된 상태에서 기획을 공유하는 건 매우 위험한 짓이다. 기획자 스스로도 실제 느낌을 모르면서 말이나 글 문장 몇 개로 상황만 설명하고선 상대방이 갸우뚱거리면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둥 기획자 말을 믿고 따르라는 둥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난 내 감을 안다. 난 감이 뛰어나지 않다.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 그제서야 “아~”하고 머리 속 생각과 맞추어봐서 어긋난 부분을 다듬는다. 그 체험을 위해 내가 택한 수단은 프로그래밍이다. 그림을 그려본 적도 있는데 손이 느려서 포기했다. 어떤 게임 기획자는 Adobe Flash 기술을 쓰기도 하고, 어떤 게임 레벨 디자이너는 레고 블럭이나 구글 스케치업을 쓰기도 한다. 어떤 개발자 출신 기획자는 유명 FPS 게임을 이용해서 MOD 게임을 만들기도 한다.

처음엔 이런 체험판이나 장난감을 만드느라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차라리 개발자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훨씬 이득이고 효율도 높다. 하지만 감을 훈련하기 위해서 온갖 종류의 상황을 일일이 개발자에게 요청하는 건 서로를 불행하게 한다. 요즘은 쉽고 편한 프로그래밍 언어나 도구가 많고 다양하므로 기획자가 조금만 더 부지럼 떨고 공부하면 이런 문제는 차츰 해결해 나갈 수 있다.

표현과 소통을 위한 프로그래밍

그 풍부하고 입체감 있는 머리 속 생각을 고작 몇 백 몇 천 낱말로 단편화해서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건 소통 효율성을 포기하겠다는 말 밖에 안된다. 기획자는 자신의 생각을 다른 직무자에게 최대한 명확하게 전해야 하므로, 말로 떠드는 것은 물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효율 높은 전달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오랜 시간 널리 쓰인 수단은 기획서라는 문서인데, 이는 어디까지나 표현과 소통 방법 중 하나일 뿐이지 종착점이 아니다.

운이 좋게도 다른 직무자와 오래도록 호흡을 맞춰와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잖아”라고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그런 눈빛도 소통과 표현 수단일 것이다. 어떤 이는 직급을 이용해서 “빠꾸(cancel)!”라고 외치는 것이 소통과 표현 수단일 것이다.

난 뚝딱 뚝딱 스스로 만들어서 실제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발전 가능성과 느낌(게임이라면 손맛이라든가)을 최대한 공유하는 것이 내 소통과 표현 방법이다. 안타까운 점은 사무실에서 이런 뚝딱거림은 자칫 일 안하고 딴짓하는 걸로 오해를 사기 일쑤란 점이다. 더구나 내 프로그래밍 능력이 떨어져서 내 생각보다 구현 시간이 오래 걸리면 “그까짓것 차라리 나(개발자)한테 얘기하지, 왜 말도 없이 혼자 낑낑대다 다른 사람들 다 놀게 해요?”라는 구박을 받을 수 있다.

사실 이런 경우가 더 많았다. 내가 택한 소통과 표현 방법이 오히려 다른 직무자들을 답답하게 하는 경우가 생겼고, 그래서 사람에 대한 인터페이스(interface)가 안좋다는, 기획자가 들을 수 있는 치욕스런 비판을 들은 적도 있다.

균형있는 관점을 위한 프로그래밍

기획자에게 필요한 덕목 중에는 창의성이나 창발성이 있다. 이것과 반대 개념이라고 할 순 없지만 날뛰는(?) 창의력을 진정시켜줄 보수성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보수성 정도에 따라서 창조 지향 기획을 하느냐 혁신 지향 기획을 하느냐 갈릴 것이다. 사람 성향이나 기획 직책(Producer, Director, Designer 등), 세부 직무(System designing, Level designing, Balance Designing 등), 혹은 상황에 따라 지향하는 바가 다를 것이다.

자신이 보수성이 강한 사람이라고 일도 언제나 보수성 짙은 기획을 한다면 스스로 양발 신발끈을 서로 묶는 짓이나 마찬가지이다. 무엇을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보수성을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 그런 조절은 다양한 경험과 관점을 통해 균형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저울에 짐이 올라왔다면 다른 한 쪽에 상황에 맞게 추를 올리거나 덜어야 하는데, 이렇게 균형을 조절할 추 역할을 해줄 다양한 생각과 경험, 관점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게임 기획자 상당 수는 다른 게임을 많이 경험해서 창의력에 자극을 받거나 혹은 현실 제약/제한점을 찾는다. 난 프로그래밍으로 대신한다. 다른 게임이나 서비스를 경험하는 행위 자체를 하지 않고 모두 프로그래밍으로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험을 하며 분석하고 이해하는 과정 중 일부 요소를 프로그래밍으로 대신한다. 다른 이가 만든 제품을 분석하여 기획서 역작성(기획서를 써서 제품을 만드는게 아니라 만들어진 제품을 보고 기획 의도를 유추하고 상상하며 거꾸로 기획서를 만드는 작업)을 하는 걸 프로그래밍으로 대신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작업들이 꼭 가치 있는 건 아니지만, 다른 관점을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러니까 균형추를 다양하게 갖출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 마다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기획자한테 프로그래밍을 하라고 권할 생각은 없다.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더 도움이 되는 방법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좀 더 빠르거나 똘똘하다면 프로그래밍을 하며 기획에 도움을 주는 방법 말고도 다른 방법도 함께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평범한 머리를 가진, 내 한계를 잘 아는, 가끔 천재를 만나면 기가 죽을 때도 있지만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이 가는 길에 돌부리는 되지 말자는 생각을 하는 사람일 뿐이다. 내 끝에 최대한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들 중 프로그래밍은 게으른 내게 그나마 잘 맞는 실천력 있는 수단이자 방법이다.

이것이 내가 기획자이면서 프로그래밍에 관심을 갖고 계속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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